우리 새벽이가 천국으로 갔다
안녕 내 첫사랑
새벽이는 올해로 16살. 나하고는 대학원생 때부터 함께 살았으니 11년 정도를 같이 산 “노묘”다.
그만큼 몸놀림이 예전 같진 않았지만, 몸이나 마음이 한 군데도 안아픈 건강한 고양이였다. 전날까지도 내 팔에 스크래치를 낼 정도로 건강했으니.
오늘 새벽에, 새벽이가 기침하는 소리에 아내가 깼고, 숨을 안 쉬어서 나를 깨웠다.
새벽이는 평소 자던 자세와 똑같이 누워 있고 몸도 따뜻했다.
그러나 “츄르”라는 단어에도 더 이상 심장이 두근 거리지 않는 새벽이를 보니, 수의학을 모르는 나도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내 세상은 무너졌다.
급한대로 새벽이가 그렇게 싫어하던 캐리어에 담아, 근처 24시 동물 병원에 갔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미 20대 내내 흘렸을 눈물보다 이 짧은 한 시간 동안 더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병원에서 집까지 새벽이를 안고 오는 동안 “대문자 I”가 무색하게 온갖 감정이 밀려왔다.
비도 눈도 안왔고 춥지도 않았다. 세상은 꽤 고요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새벽에 갈 때는 차가 없어서 40분, 올 때는 출근 시간이라 차가 막혀 1시간 정도 걸렸다) 반려동물 장례식장에 가서 다시 또 울면서 새벽이를 보내주고 왔다.
새벽이는 가는 순간까지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집사를 배려하고 또 사랑해줬다. 사랑 안 해줘도 되고 사고 쳐도 괜찮으니까 더 있다가 가지.
집에 다른 고양이가 없었다면 같이 가자고 할 텐데.
한 3년 쯤 전부터 새벽이가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를 대비했어야 하지만, 새벽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프지 않았기에 그러지 않았고, 일부러라도 생각과 죽음을 거리두려했다.
새벽이는 20살, 30살 넘게 나와 함께 하면서 기네스북에 오를 것이다. 라고 믿었으니까.
오만함의 결과는 너무 비참하다. “있을때나 잘하지”라는 말이 휴대폰, 스마트워치, 노트북, 책상 위, 냉장고 옆, 식탁 아래, 침대, 밥 물 그릇, 쌓여 있는 츄르와 템테이션 등 매 순간 모든 공간에서 나를 힘들게 한다.
머리로는 고된 몸으로 재미 없게 나랑 같이 있는 것보다 천국에서 제일 맛있는 밥에 제일 편한 쿠션에 제일 좋은 컨디션으로 제일 재밌는 놀이를 하면서 보내는 것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을 이해하고 기쁜 일임을 알고 있지만, 내 욕심만이 동의하지 않고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새벽이의 마지막 새벽의 모든 것이 다행과 최선의 상황들이지만, 너무 속상하다.
펫로스 증후군은 함께 하던 반려동물을 천국으로 보내며 나타나는 아픈 마음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후유증이 몇달에서 몇년까지도 간다는데, 나는 죽을때까지 낫지 않기를 바란다. 수십년이 지나도 우리 새벽이 라는 단어를 들으면 눈물이 나길 바란다.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덤덤해지는 건 새벽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새벽이는 내가 가장 어두울 때부터 기쁠때나 슬플때나 나와 함께해 준 소중한 고양이다. 정말로 새벽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이 세상에 없었을거다. 내가 잘 나갈때 함께 기쁨의 츄르 파티를 했고, 세상 추할때도 아무말 없이 나와 함께 있어줬다.
다시 한번, 새벽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집사를 최대한 사랑했다. 그렇게 까지 해줬는데도 이렇게 지지리 궁상을 떠는 집사를 보면 기가 찰 것 같다. 미안해 집사가 멍청해서 그래.
우리 새벽이가 벌써 너무 그립다.
나를 집사로 선택해줘서 고마워 새벽아.
먼저 가서 놀고 있어, 나중에 또 보자.